다대포를 구슬피 떠도는 임란진혼곡

김정수 기자(sochisum1143@hanmail.net) 2012-10-07 11:54

다대포를 구슬피 떠도는 임란진혼곡

다대전투의 걸웅 윤흥신

‘다대포의 하늘이시여,
굽어살피소서!
다대포를 떠도는 혼령이시여,
어여삐 여기소서!
이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가 시대를 초월하여 맥동 치게끔,
모든 한민족의 가슴에 절절이 사무치게끔,
저의 무딘 칼날을 빛나게 하소서!’

 
프롤로그--- 글쓴이[시인.수필가.소설가. 은유 김영찬선생]

우리민족은 상기(想起)할 때마다 몸서리치는 두 번의 특별한 전쟁을 치렀다. 한번은 1950년 6월 25일 북괴군 남침에 의한 동족상쟁(同族相爭)인 6.25 전쟁이요, 또 한 번은 그보다 358년 앞선 1592년 임진(壬辰)년 왜국(倭國)의 침략에 의해 겪게 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한나라가 내부세력간의 분열(分列)과 재환(災患) 등으로 국력이 크게 쇠(衰)하게 되면, 자연스레 주변국들로부터 도발(挑發)이나 침공(侵攻)을 받게 마련이다. 그리고 역사는 기록함에 있어 힘이 강한 나라의 침략과 정복행위를 정벌로 묘사하여 기리 칭송 하지만, 반대로 힘이 약해 정복을 당하면 가차 없이 비웃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만 해도 그렇다. 자그마한 반도소국(半島小國)에 불과한 조선의 임금이나 조종의 대신들은 보다 광활한 대륙을 지닌 중국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외경심을 갖고 섬기려했으며, 반면에 왜국(倭)國)에 대해서는 섬나라오랑캐 라면 무조건적인 비하를 서슴치 않았다.
 
이는 강한 자 에게는 무조건 아부하고 굴종하려드는 비굴함을 지닌 인간들이 대개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거만하고 야비하게 구는 옹졸(擁拙)함을 동시에 지닌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또한 백성들이야 도탄(塗炭)에 빠지든 말든 국방력이야 쇠하든 말든 권력층들이 사분오열(四分五裂)로 나뉘어 당파싸움만 일삼던 조선 선조(宣祖)때, 그렇게 괄시(恝視)해왔던 그 섬나라 오랑캐의 도발로 말미암아 7년동안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등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의 참화(慘禍)를 겪게 된 것이다.
 
이 장편은 왜국(倭國)의 대규모 병력이 쓰시마섬(對馬島)에 웅거(雄據)하고, 이어 부산포(釜山浦) 및 다대포 (多大浦)를 기습(奇襲)해온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 발발(勃發)일을 주요 시점으로 잡고 있다. 이 장편은 당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들어온 왜군을 맞아 다대포진성(多大浦鎭城)을 지키다가 끝내 장렬하게 순사(殉死)한 영웅, 그럼에도 후대(後代)의 관심에서 소홀해진 어느 한 영웅에 관한 서사시(敍事詩)이다.
 
그는 임란을 통해 최초의 승전보(勝戰譜)를 우리역사에 남긴 장수로서 우리는 그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공(戰功)을 높이 기려야 한다.
 
역사(歷史)는 돌이킬 수 없다.
도도하게 흐를 뿐 결코 되돌아 올 줄 모르는 저 강물과 같다.
역사 속에 숱한 숨결이 녹아 있다.
대해(大海)를 이루는 웅지(雄志)가 있으며, 태산(泰山)을 이루는 기개(氣槪)가 있다.

보라!
다대포의 하늘이여,
다대포의 산하(山河)여,
다대포의 바다여,
다대포를 살아가는 민초(民草)들이여!
오늘도
다대포를 구슬피 떠도는 임란 호국열사(護國烈士)들을 위한 진혼곡(鎭魂曲)이
들리지 않느뇨?


역사(歷史)는 과거이다. 그리고 현재이며 다가올 미래이다.
역사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의 연속이며 삶의 연속이다.
따라서 역사 속엔 우리의 숨결이 부단(不斷)히 녹아들 것이다.
 
윤흥신 공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과 신경(申炅)이 쓴 <재조번방지再造番邦志>, 구사맹(具思孟)이 쓴 조망록<繰亡錄>, 그리고 범어사(梵魚寺)의 기록지 <국조전망인시식책자(國朝戰亡人施冊子) 등에 ‘윤흥신은 4월14일에는 다대포진성을 지켜서나,4월15일에 다시 밀려온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라는, 내용에 있어 거의 한결같고 그나마 두서너 줄에 그칠뿐이다.
 
그리고 다대1동 소재 윤공단의 첨사윤흥신공순절비(僉使尹興信公殉節碑)란 비석에는,
始倭陷釜山(시왜함부산) 分兵圍多大(분병위다대) 公力却之(공력각지) 軍吏進曰(군리진왈) 賊必悉至(적필실지) 莫如避(막여피) 公叱曰(공질왈) 有死而己(유사이기) 明日賊大集(명일적대집) 軍遂潰(군수궤) 公獨終日射賊 (공독종일사적) 賊城陷死之(적성함사지)란 문구가 새겨져있다. 그 비문은 조선 순조 때 이조 판서에 오른 조진관(趙鎭寬)이 지은 것으로 그 비문을 직역(直譯)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왜군은 부산성을 함락하고 군사를 나누어 다대성을 포위하였는데, 공이 힘을 다해 물리쳤다. 군관이 나서서 말하기를 ‘적이 반드시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니 피하라’ 하니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내게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다음날 대규모의 왜군이 집결하여 다시 전투가 시작되자 공이 혼자 종일 활을 쏘아 적을 대적하여 전투를 벌여서나, 적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죽었다.”
 
윤흥신 공이 순사한지 16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후기의 문신(文臣) 조엄(趙嚴)과 강필리(姜必履)에 의해 그의 사적을 밝히려는 시도는 있었다. 허나 그의 과거행적은 물론, 다대포진성전투와 관련된 자료가 전무하여 그나마 성과를 기대할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약전(略傳)도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때 화를 당한 윤임(尹任)의 아들이라는 것만 역사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조엄은 <윤공유사尹公遺事)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으로 남겼다.
“일찍이 <징비록>을 보니 ‘다대포진 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고 기술하였고, 또 <재조번방지>에도 ‘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포진 첨사 윤흥신이 힘껏 싸우다가 피살되었다.‘ 고 기술하였다. <징비록>은 선조 때의 상신(相臣) 유성룡이 찬술한 책이고, <재조번방지>는 동양위(東陽尉)의 맏아들인 신경이 찬술한 책이라, 당시의 문헌으로 반드시 고증하였을 것이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임란 후 160년이 지난 1757년 정축(丁丑)년 내가 동래부사가 되어 부임한 그이튿날 충열사를 참배하였던바, 충열사에는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공과 부산진포 첨사 정발(鄭撥)공만이 제향될뿐, 다대포진 첨사 윤흥신 공의 위패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날 같은 부산지역에서 전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송.정 양공(兩公)만 한 묘(廟)에 향사되었으며,심지어 향리와 노비라도 전사한 자는 함께 향사되었음에도 윤공만 참여할 수 없었는지 그 까닭이 궁금했다. 이에 읍지(邑誌)를 상고하고, 다대포를 찾아가서 수소문 해보았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지라 전문(專聞)마저 끊어졌으니, 후예들도 알지 못하고 후인(後人)이 천발(薦拔)하는 일도 없으니, 당시의 윤공의 의열(義烈)이 드러나지 않게 됨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1761년 신사(辛巳)년에 내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도내의 효열(孝烈) 및 절의(節義)를 표창하는데, 윤공의 일도 그 한가지였다. 예조에서 증직할 것을 의정부에 올리고, 의정부에서 다시 상주하여 조만간 그 하회가 있을 것이나, 마음속에 석연치 않은 것은 역시 윤공의 사적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근자에 문득 구사맹의 <조망록>을 얻어 보았는데, 그 사절조(死節條)에 다대포진첨사 윤흥신을 특서하고,주(註)하여 말하기를 내일 왜적이 크게 쳐들어 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우선 나가 피하는게 좋겠다, 라고 하니, 윤흥신이 말하기를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어찌 차마 떠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튿날 적이 과연 크게 이르니 군졸들이 모두 도망갔다.
 
홀로 종일토록 적을 쏘아 죽이다가 성이 함락됨에 이에 죽었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을 가지고도 충열사에 합향(合享)되지 않는다면, 충혼을 무엇으로 위로하며 후세사람을 무엇으로 권장하리오.
 
강필리 또한 <윤공사절기尹公死節記 >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으로 남겼다.
‘1764년 갑신년(甲申年) 가을에 내가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충렬비(우암송시열이 비문작성)를 읽었으되 윤공이 실려 있지 않음을 슬퍼하였다. 그 유적지를 찾아보았어도 이미 세월이 오래지나 그 자취를 살필 길이 없고, 지방 노인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금년 봄에 내가 금정산 범어사에 놀려나갔다가 우연히 <국조전망인시식책자>를 보니 다대포진첨사 윤공의 이름이 송, 정 양공의 이름 밑에 크게 씌어 있었다. 공의 정충(貞忠)으로 유사(遺祠)에 배향(配享)되지 못하고 다만 절간의 시식을 받을 뿐이니,이 어찌 사림(士林)의 향모(向慕)하는 뜻이 산승(山僧)의 숭모함과 같지 못할꼬.
 
......본부 동래(東萊)와 양진 부산(釜山浦鎭, 多大浦鎭)이 함락된 것은 같은 시기이다. 부산성은 임진 4월14일이고 본부는15일이다. 다대성의 함락 또한 본부와 같은 날인지 알 수는 없어나 같은 날이 아니라면 그다음 날이 분명하니, 요컨대 15일이나 16일 양일을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터이다.
 
윤흥신 공의 사적(史蹟)은 임란 이후 오랜 세월, 역사의 소용돌이에 묻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 160여년이 훌쩍 지난 뒤에 동래부사로 부임해온 조엄과 강필리에 의해 비로소 발현(發顯)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1772년(임진년) 2월에 이르러서야 출렬사에 제향(祭享)을 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 다대포진성이 함락되고 그가 순사한지 꼭 180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 부 언---

가급적 기록으로 남아있는 사료에 충실하고자 했으나 윤흥신 공과 관련된 사료가 워낙 전무한지라, 큰 사건의 개요를 제외하고 공의 과거 행적이나 관직, 등장 인물이나 상황제현은 다분히 추론(推論)에 의해 기술(記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완성되어 책으로 펴내게 될 ‘임란영웅 윤흥신 공 대하역사장편소설’ [다대포多大浦를 구슬피 떠도는 임란진혼곡壬亂鎭魂曲]은 오로지 당 시대를 살다 간 공을 주인공으로 극화(劇化)한 소설로써 읽혀지길 바랄뿐이며, 기존 역사사관(歷史史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자그마한 허물은 작가의 주관적 인식으로 이해해 주길 바랄뿐이다.
 
이 소설을 진중하게 읽은 독자들께 감히 청하옵건대, 잘못된 표현이나 그릇된 설정(設定)이 발견되면 번거로우 시더라도 필자(筆者)와 후에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을 위해 그 즉시 바로 잡아주시길 바란다.
 
 
“이 책을 오랜 인고의 세월을 함께 동고동락해온 다대포주민들과 다대포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이웃들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바치는 바이다”.

[편집자주: sochisum1143@hanmail.net]
 
 
 
 
 
 
 
 
 [제1회]

 여명黎明의 다대포


-제1회 계속 이어짐-
 
 

 

 

저작권자 danews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기사평 (0)
댓글 등록 폼

로그인을 하시면 기사평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